VITAL VANITAS
바니타스화는 16-17세기 유럽 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유한함을 상징하는 상징들을 등장시킨 정물화의 한 장르로 ‘공허’, ‘헛됨’, ‘가치없음’을 뜻하는 용어이다. 두개골, 과일, 꽃, 거품, 모래 시계 등 유한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상징들로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한다. 이러한 바니타스의 상징을 병(헤이지 리엠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사람을 의미한다.) 속에 넣어 ‘유한함’, ‘생명의 끝’을 ‘새로운 시작‘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나에게 인체의 뼈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조소를 전공하며 인체의 기본이 되는 토대이며 해부학을 배울 때 가장 매료되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아주 많은 관심과 그 형태의 아름다움에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2014년부터 나에겐 또 다른 의미로 남게 되었다. 순탄하지 않았던 과정으로 아이를 얻게 되었는데, 고관절 이형성증으로 태어나 신생아부터 교정과 수술을 언급하며 두근두근한 세월을 보내었다. 성장함에 따라 끝이 보이나 싶었는데 최근 들어 다시 수술이 언급되며 나의 머리 속은 온통 우리 아이의 뼈로 가득 찼다. 뼈를 자르고 판으로 고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 다리와 바꿔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였다. 아이가 걷고, 뛰고, 웃고, 자고, 앞니가 빠지고 다시 새로운 이가 나오고 하는 과정이 얼마나 소중하고 힘들고 아름다운지 경험하게 되었다. 당연하게 쉽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였다. 나에게 병이란 형태는 사람을 빗대어 이야기하듯이 인체의 뼈 형태는 나에게 생명의 시작이며 기초가 되는 상징이다.
뼈, 해골을 이야기하면, 죽음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생명체의 삶이 끝나는 것을 죽음이라 말한다. 죽음은 피하고 싶은 주제이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 나의 끝을 안다는 것은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계기는 호스피스 봉사였다. 육신에서 생명이 빠져나가는, 그 찰나의 순간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이 무섭고 허무했다. ‘죽음’을 누군가에게 설명하게 된 첫 경험은 아이에게 키우던 강아지의 죽음을 설명해야 했을 때였다. 나도 겪어보지 못한 과정을, 두려움 많을 어린 눈동자 앞에서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모르는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창작의 고통이기도 했다. ‘더 이상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는 곳으로 가는 것이지만, 슬픈 이유는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삶에 밀접한 일이며, 결국은 죽음이 삶의 밑바탕이라는 것을 살아가면서 더욱 느끼게 된다. 하루하루에 주어진 이 순간에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죽음’을 통해 생각하고 느끼게 된다. 모든 것의 마무리는 새로운 시작의 준비인 것이다. 안개로 가려진 막연한 이미지 같은 생각들을 삶과 사람 속에 녹여 표현하고 싶었다. ‘병’자, 병 인간을 통해 ‘죽음’을 ‘시작’으로 또 다른 ‘생명력’으로 전달하고자 한다.
-작가노트
헤이지 리엠 개인전 《Vital Vanitas》 서문
죽음, 삶의 어머니
홍예지 미술비평가
살아 있는 동안 뼈는 보이지 않는다. 감춰진 뼈가 삶을 지탱한다. 생이 끝났을 때 비로소 뼈가 드러난다. 뼈는 삶의 적나라한 본질로서 망자를 대신해 산 자들에게 고한다. 인생무상. 덧없음이 뼈에 사무칠 때, 산 자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삶에 대한 감사다. 덧없다고 부러 삶을 망쳐서는 안 된다. 삶의 끝이자 시작인 죽음은, 산 자들이 판돈을 걸 듯이 가지고 놀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감히 그렇게 한 자가 있다면 존엄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가해질 수 있는 가장 비참한 폭력이며, 그의 신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병들게 하는 치명적인 저주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철저히 텅 빈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빈 병처럼. 병에 들어찬 물이 서서히 줄어드는 동안 인간은 가벼워진다. 스스로 울림통이 된다. 제 멋대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병에 드나드는 바람의 필연적인 음조가 울려 퍼진다. 그것이 그 사람의 운명이자 이야기다.
헤이지 리엠의 그림에서 병 속에 든 뼈는 죽음에 대한 불길한 경고가 아니라 죽음을 수용하라는 메시지다. 사람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에 뼈가 생성되던 그 지점으로 돌아가 보라는 권유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던 우리는, 한때 형체 없던 시기를 지나 뚜렷한 존재로 형성되는 과정을 거쳤다. 언젠가 다시 그 이전으로 - 살점이 스러져 뼈만 남고, 그 뼈마저 물 속으로 융해되는 상태로 돌아갈 때, 우리는 죽음을 자양분 삼아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회귀, 삶과 죽음과 삶의 끝없는 순환을 인식할 때, 인간은 개체의 한계를 넘어 자신과 연결된 또 다른 생명을 고려하게 된다. 그리고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을 바라고 준비하게 된다. 죽음을 항상 기억하는 삶은, 그렇지 않은 삶과 다르게 숭고함을 지니며, 헤이지 리엠의 그림 속 카네이션이 암시하듯 감사와 겸손을 바탕으로 의미 있게 전개된다. 어차피 우리는 병의 두께와 테두리라는 분명한 한계를 지닌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조건이 삶을 가능하게 하고, 또 수많은 경험을 담아낼 수 있게 한다는 점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병 속의 뼈는 유한 속의 무한을 가리키며 우리가 영원한 생명 그 자체라는 본질을 기억하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