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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ttle

A bottle

 

술박스에 나란히 빽빽하게 들어있는 술병들을 상가 뒤편에서 보고 마치 나를 보는 느낌 혹은 우리를 보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늘 대체될 수 있다는 생각과 재사용되어진다는 기분이 술박스에 들어있는 술병들을 보며 과하게 이입됨을 느꼈다. 모양은 다르지만 형태는 비슷하며 사용되어진 후 마구 꽂혀 있으며 갑갑한 통 안에서 다시 쓰이길 기다리는 달그락 쨍쨍거리며 들어있는 모습에 갑자기 슬퍼졌고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사는 사회에 불행함을 느끼며 매우 힘들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살다보면 세상의 틀 안에 갇혀 있는 나의 영혼이 힘들어질 때가 있다. 그 갑갑함은 누구나 한번은 느낄 것이다.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을 병으로 표현해보고 싶었고, 나름의 자유를 주고 싶었다. 사람으로 치면 일탈이랄까...

형태와 색채의 변주와 진화

- 이희진 작가의 <A Bottle> 시리즈에 부쳐

 

하 선 규(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20세기 현대미술을 돌아보면, 미술가들이 자신의 열정과 소망을 표현하기 위해 매우 다양한 길을 개척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몇 사람만 기억해 보자. 가령 세잔은 대상의 객관적인 모습이 아니라, ‘주관적이며 신체적인’ 모습을 담기 위해 진력하였다. 다시 말해서, 세잔은 자신의 신체가 오랜 동안 반복해서 느끼고 교감하면서 알게 된 모습, 신체의 방향, 강도, 리듬, 멜로디, 분위기를 통해 체득한 모습을 담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반면에 키르히너 같은 표현주의 화가는 인간이 처해 있는 끔찍한 상황과 극도의 불안을 보여주기 위해 인위적인 왜곡의 길을 택하였다. 즉 그는 인간과 사물의 모습을 그 형태와 색채에서 기이하게 왜곡시키고 극단적으로 과장하여 보여주는 방식을 실천한 것이다. 다른 한편, 1930년대 후기의 클레는 이들과는 또 다른 길을 걸어갔다. 클레는 ‘화가는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볼 수 있도록 해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실제로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회화의 언어에 도달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클레는 독창적인 조형적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세계였다. 클레는 가시적인 대상을 상형문자 내지 상징적 부호 같은 단순화된 형태로 대체하면서도, 이 형태들 사이에 중의적인 연관성과 불투명한 색채의 감정적 뉘앙스를 불어넣었다. 이렇게 창조된 세계는 어딘지 초월적이며 비극적이면서도, 변증법적인 위트와 긴장감이 가득 차 있는 독특한 세계였다.

 

이제 이희진 작가가 이번 전시회에서, 특히 <A Bottle> 연작을 통해 시도하고 있는 조형적 언어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 언어를 ‘알레고리와 생명의 만남’이라고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린 병은 실제 사물이나 레디메이드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의 알레고리이며, 알레고리로서 그냥 완결되고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고 성장해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번에 비슷비슷하게 생긴 많은 병들을 화폭에 담고, 또 입체로도 만들었다. 병들은 그녀가 직접 손으로 빚어낸 것임을 내부의 구획과 모양새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병들은 때로는 홀로 당당하게 서 있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여러 모습의 병들과 촘촘히 밀집하여 군집을 이루고 있다. 거의 모든 병들이 그 형태와 색채 모자이크의 측면에서 매우 유사하고, 색채 경영이 밝고 활기차기 때문에 감상자는 여러 종류의 병들과 쉽게 친숙해진다. 그런데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병들을 관찰하면, 병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개성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으며, 병들 사이에 어떤 살아있는 교감과 소통이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감상자는 병들 사이에서 어떤 음악적인 분위기와 리듬이 퍼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반복과 차이의 리듬 혹은 생성과 진화의 리듬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왜냐하면 병들 하나하나의 형태와 색채가 서로 유사하면서도 끊임없이 미세한 차이를 생성시키며 변형되고, 어떤 방향을 향하여 진화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병들은 어느 틈에 익숙한 상황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 속으로 진입한다. 스스로 사유하고 결합하여, 스스로 새로운 짜임관계를 형성하면서 하나의 ‘신전(神殿)’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런데 작품 제목은 <병신전>이지만, 엄숙한 신전이라기보다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성(城) 같다. 이 신전에서는 어떠한 위압감도, 어떠한 섬뜩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낭만주의자들이 꿈꾸었던 소망의 ‘푸른 꽃’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병들은 이 소망의 신전을 수놓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침내 화면 밖으로 걸어 나간다. <병들의 세상>이라는 조각 작품을 이루면서,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개체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모든 병들은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었던 듯하다. 병들은 서로 많이 닮았지만, 그 만큼 서로 다르기도 하다. 그리고 다른 만큼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살아있는 삶의 몸짓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 병들 하나하나는 서서 혹은 누워서, 똑바로 혹은 뒤집혀서 신호를 보내고 말을 건넨다. 그것은 누구와도 유사하지만, 누구와도 같지는 않는 어떤 개별자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소리라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타인들과 참된 대화와 교감을 갖고 싶다는 진솔한 몸짓이기도 하다.

늦어도 여기서 이희진의 작업을 저변에서 이끌고 있는 열정과 소망의 내용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개별자의 구체적인 삶을 억압해서도 안 되고, 축약시켜서도 안 된다는 에토스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실존적 삶의 지난함과 보람을 모두 보듬고 구제하려는 참된 삶의 에토스이다. 하지만 작가의 에토스는 결코 개별자를 세계로부터 고립시키거나 절대화시키는 개인주의의 에토스가 아니다. 반대로 병들의 부드러운 제스처와 상호 작용에서 보듯, 작가의 에토스는 타자들과의 공존과 공생을 희구하는 평등의 에토스이다. 그것은 타자들의 개성과 차이를 온전히 인정하고 존중하려는 개별자적 정의의 에토스이다. 바로 이 에토스 덕분에 작가가 그린 작은 병들에서도 어떤 왜소함이나 위축의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 이희진 작가가 이 에토스를 다음 작업에서는 어떠한 알레고리와 조형적인 언어로 풀어내게 될지, 벌써부터 적잖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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